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간다.

세월(歲月) 부대인(不待人)이라했던가 오늘 아침에 평소 존경하는 지인께서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 오셨다. 내용과 사진을 보니 오늘이 처서(處暑)라고 하시며 더운 여름날씨가 지나가고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어학사전에 보면 “일년 중 늦여름 더위가 물러가는 때”로 정의 하고 있고 다음 검색 창에서는 “24절기 중 열네 번째 절기.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불렀다.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산소의 풀을 깎아 벌초를 한다.”고 정의를 해 놓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조국 자유대한 민국, 생각만 해도 감사할 조건들이 참 많다. 전 세계에서 사계절이 우리나라만큼 뚜렷한 나라가 어디 있으며, 안전이 보장된 나라, 복지가 잘 돼있는 나라, 의료보험 체계가 정말 잘되어 있는 나라, 인정이 많고 서로서로 도와주는 품앗이 제도도 잘되어 있는 나라이다. 더욱이 지방자치(地方自治) 제도(制度)도 나날이 발전되어 가는 모습에 더욱더 기분이 좋다.
나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음에 진정으로 행복(幸福)을 느끼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다른 나라가 좋다고 하는 친구들도 가끔 있는데 나는 외국(外國) 경험을 이야기 해 주면서 친구야 우리나라도 옛날 20년 전에는 너 말대로 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世界的)으로 우리나라만큼 살기가 좋은 곳이 그다지 없어 대중교통(大衆交通)만 해도 그렇고,,,라고 말하면 이제는 다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맞아 맛 장구를 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pandemic)으로 온 세계가 고통가운데 있었지만 이제는 독감으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처방정책으로 잘 극복하고 있다.
이번 달에는 어떤 칼럼으로 독자들의 가려운 데를 끓어 드릴 수 있을까 하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펜을 들었다.
오늘은 1991년부터 실시되어 날로 발전해가고 있는 지방자치(地方自治) 풀뿌리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서 보니 대통령, 국회의원은 물론 이제는 각 지방 광역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시, 도, 구 의원까지 우리 국민들이 손수 선거를 통해서 뽑아서 우리 지역을 발전 시켜나가고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또 우리 자녀들이 지방행정(地方行政)과 지방자치(地方自治)의 뿌리와 역사를 잘 모르고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는데 이 글을 통해 한 번쯤은 읽어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Research해서 올려본다.
제9차 개정지방자치법과 지방의회의원선거법에 따라 1991년 3월 26일 시·군·자치구의회(기초의회) 의원선거를 실시했던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자.
지방자치의 의미
지방자치란 다의적(多義的)인 개념이다. 지방자치는 전통적으로 주민자치와 단체자치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주민 자치는 자치단체와 주민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자치제도로서, 지방주민들이 일상생활에 관련되는 사무를 국가(중앙정부)에 의하지 않고 자기들의 의사와 책임 하에 스스로(또는 대표자를 선출하여) 처리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단체 자치는 자치단체와 국가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자치제도로서, 법률상으로 법인격을 가진 자치단체가 국가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된 지위를 가지고 일정한 권한을 부여받아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처리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전자를 정치적 의미의 자치, 후자를 법률적 의미의 자치라고 한다.
성격
지방자치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지방자치는 근대에 등장한 제도로서 근대적·민족적 통일국가의 성립을 그 이론적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지방자치는 근대 이전의 중세기 봉건제도하에서의 지방단체 및 자치도시가 향유하였던 봉건적 특권 내지 도시의 자치권과 구별된다.
이들 지방단체와 자치도시는 소국가적(小國家的)인 지위 내지 주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국가는 통일성이 없었다. 지방자치는 이러한 중세국가의 다원적 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적 통일국가를 이룩하면서 형성될 수 있었다.
둘째로, 지방자치는 연방국가를 구성하는 지분국가(支分國家)인 주(州)의 권력과 구별된다. 그것은 정치적 통일의 기반 위에서 단일국가로부터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받아 중앙통제하에 행사하는 제도이므로 그 관할구역 내에서 입법·행정·사법에 관하여 준주권적(準主權的)인 지위를 가지며 원칙적으로 연방국가와 수평적 대등관계에 있는 각 지분국가의 권력은 자치권이 아니다.
셋째로, 지방자치는 이론상 지방주민의 의사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므로 국가의 하급행정기관(일선기관)이 관장함이 부적당하다. 따라서, 그것은 행정적 분권이 아니라 자치적 분권의 성질을 가진다. 지방자치는 ① 국가로부터 독립된 법인격을 가진 지방단체, ② 일정한 지역과 주민, ③ 지방적 사무, ④ 자치권, ⑤ 주민에 의한 지방정치 및 주민참여, ⑥ 자주재원(自主財源)을 그 요소로 한다.
정치적 기능
이론상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영미학자들의 견해와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는 유럽대륙학자들의 견해가 1950년대 초부터 대립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학설이 통설이다. 다음과 같은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
① 독재정치에 대한 방어기능, 즉 지역의 민주화를 통하여 국정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지방분권을 기초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참여를 실현시켜 권력을 분산시킨다.
② 지역 내의 사무를 자주적으로 결정, 처리하므로 주민의사의 우월적 가치, 행위의 자기책임성·자기결정성, 기관의 선거 등 민주주의의 본질적 내용을 실현하는 기능을 한다.
③ 중앙정국의 혼란·불안정, 무정부상태가 지방에까지 파급되지 않도록 방지하고 지방정치와 행정의 독자성·안정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자치
우리나라에는 고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 지방자치가 실시된 바 없다. 즉, 관찰사·부사·목사·군수·현감 등 지방관이 자치하였다고 하나,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외관이지 지방주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주민의사에 따라 사무를 처리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1. 조선시대의 자치제도
조선시대의 면(面)과 동(洞)·이(里)는 주민이 피지배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주적으로 구성한 행정단위로서 면장·동장·이장의 선임에는 그 주민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어 자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면을 황해도·평안도에서는 坊, 함경도 북부에서는 社라고 불렀다). 대체로 면장은 주민의 추천 또는 선거에 의하여 수령(守令)이 임명하였다.
면장의 추천방법에는 ① 면에 거주하는 양반 중에서 추천하는 방법, ② 면내 거주 양반과 상민이 협의하여 인선하는 방법, ③ 면내 동장·이장이 여러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고 수령이 그 중에서 선정하는 방법, ④ 면민이 윤번제로 면장에 취임하되 전임자가 퇴임할 때 후임자를 지명하는 방법, ⑤ 동장·이장이 후보자 여러 명을 선정하고 후보자별로 1책씩 장부를 만들어 각 호에 배부한 다음, 적임인 자의 장부에 자기 이름을 기입하도록 하여 다수를 얻은 자를 면장으로 선임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러나 면장의 직은 관에서 인정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아 양반 중에는 그 직을 맡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동·이는 면내에 있는 작은 촌락의 집단으로서 포(浦)·평(坪)·촌(村)이라고도 칭하였는데, 자치적 성격을 가진 최소의 행정단위였다. 동장·이장은 형식상으로는 수령이 임명하였으나 실제로는 동민·이민의 추천에 의하거나 면장이 선임하였다. 동민·이장의 임기는 과실이 없는 한 제한이 없는 곳도 있었고, 1년이되 연임이 허용되는 곳도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1895년(고종 32)에 발표된 「향회조규(鄕會條規)」와 「향회판무규정(鄕會辦務規定)」에는 지방주민이 그 지방행정 단위의 공공사무 처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지방자치의 발달에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이·면·군에 주민으로 구성되는 이회(里會)·면회(面會)·군회(郡會)를 두고 공적 사항을 협의하게 하였는데 이는 한일합병 때까지 시행되었다.
이회(里會, 小會)는 존위(尊位)와 이내(里內)의 호당 1인으로 구성되었고, 면회(面會, 中會)는 집강(執綱), 면내 이의 존위 및 각 이에서 임시로 공선한 2인 이하로 구성되며, 군회(郡會, 大會)는 군수(郡守), 각 면의 집강 및 각 면에서 공선된 2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향회의 의결사항은 교육·호적 및 지적·위생·사창(社倉)·도로·교량·식산흥업·공공산림·제언·항(港)·세목 및 납세·환난구휼(患難救恤)·공공복무·제반계약 등 이었다.
또한, 「향회판무규정」에 의하여 존위를 관에서 차정(差定:임명)하던 예는 폐지되고 1년을 체기(遞期: 임기)로 정하여 매년 1월에 당해 이민이 회의를 열어 양반·상민에 구애됨이 없이 권선(圈選: 선거)하고 그 결과를 면에 보고하였으며, 면에서는 각 이의 존위를 군에 합보하였다.
존위가 임무를 위배한 때에는 이의 회원이 회동하여 그 이유를 고하고 면에 보고한 후에 임기에 상관없이 개선하여 면에 보고하였다. 존위는 명예직으로서 30세 이상으로 하였다.
면의 집강도 관에서 임명하던 예가 폐지되었으며, 1년을 임기로 하여 매년 1월에 면내 각 이의 존위와 공거인(公擧人)이 공동회의를 열어 반·상에 불구하고 권선하고, 그 결과를 군에 보고하였다. 집강도 임무를 위배한 때에는 임기에 상관없이 면내 각 이의 존위 및 공거인이 회의하여 개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제도상으로 지방자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1895년에 「향회조규」 및 「향회판무규정」이 시행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조규와 규정은 지방 공공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주민의 참정권·발언권을 인정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향약제도가 쇠퇴한 후로는 지방자치·지방선거가 실시된 일이 없으며 자치사상이 국민들에게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였으나 1910년의 한일합병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의 자치제도
근대적 지방자치제도가 불완전하나마 채택된 것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서였다. 즉, 1913년 10월에 제령(制令) 제7호로 부에 「부제(府制)」를, 제령 제8호로 재한 일본인의 교육을 위한 「학교조합령」을 제정하고, 전자는 1914년 4월 1일부터, 후자는 1914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으며, 1917년에는 제령 제1호로서 「면제(面制)」를 공포, 시행하였다.
또한, 1920년에 제령 제15호로 「도지방비령(道地方費令)」, 제령 제14호로 「학교비령(學校費令)」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러나 학교조합을 제외하고는 의회는 없었고 자문기관만이 있었으며, 그 심의사항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 뒤 1931년에 「부제」·「읍면제」·「학교비령」 중 개정, 「학교조합령」 중 개정, 「도제(道制)」 등이 제령 제13호 내지 제15호로 공포되어 「부제」와 「읍면제」는 1931년 4월부터, 「도제」는 1933년 4월부터 시행되었다.
도·부·읍·면에는 법인격이 부여되었으며, 법령의 범위 내에서 그 공공사무 및 법률, 칙령 또는 제령에 의하여 도에 속하는 사무를 처리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도·부·읍의 조직은 의결기관과 집행기관으로 구분하였으며, 의결기관으로는 도회(道會)·부회(府會)·읍회를 두었는데 그 의장은 각각 도지사·부윤(府尹)·읍장이 맡았다. 의결기관이라고는 하나 자문기관의 지위를 겨우 면한 정도였다. 권한은 도정 전반에 관한 것이 아니고 법령에 열거된 사항에 한정 되었다.
집행기관인 도지사·부윤·읍장은 국가가 임명한 관리였다.
다만 면에는 협의회를 두었는데 면장의 자문기관(諮問機關)이었다. 도의회 의원의 정수는 조선총독이 도에 따라 20∼50인으로 정하였는데, 그 정수의 3분의 2는 각 선거구에서의 부회·읍회의 의원과 면협의회 의원이 선거하는 간접선거제였고 3분의 1은 도지사가 임명하였다.
부회·읍회 및 면협의회 의원의 정수는 인구에 따라 정하되, 부는 24∼36인, 읍·면은 8∼10인이었으며, 의원은 주민의 직선으로 선출되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25세 이상의 남자로서 독립된 생계를 영위하고 1년 이상 그 단체의 주민으로서 조선총독이 지정한 부세, 읍·면세 연액 5원(圓) 이상을 납부하는 자만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며 법정의 결격사유가 있는 자는 제외하였다.
1943년에는 의원의 자유로운 입후보를 금지하고 당해 단체의 의원 정수와 같은 수의 입후보자를 추천하여 추천받는 자만이 입후보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선거인의 투표로 선택할 여지가 없었고, 추천을 받은 후보자는 전원 당선되었다. 그 결과 지방자치는 완전히 전제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지방자치
한편, 미군정시대에는 1946년 3월에 군정법령 제60호로 “1945년 8월 15일 이전 38선 이남 조선 내에 존재한 각 도회……부회·읍회, 면협의회, 각 군(郡)·도(島)의 학교평의회를 해산”하였고, 1946년 11월에 군정법령 제126호로 “…… 민주주의적 지방자치의 원칙하에 국가발전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도지사·부윤·군수·도사(島司), 읍·면장과 도회·부회·읍회·면회 의원 등을 보통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보통선거에 의한 주민 참정과 자치제도의 길이 열린 것은 1948년의 건국 이후 「헌법」에 지방자치제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고, 이에 따라 「지방자치법」이 1949년 7월 4일에 법률 제32호로 공포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지방자치법의 제정
「헌법」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하고 자치단체에 지방의회를 두며, 그 조직·권한과 의원선거는 법률(法律)로 정한다고 규정하였다. 건국 당시의 지방행정조직은 조선총독부 지방관제에 의거하였으므로 이를 개정하기 위하여 1948년 11월 17일 법률 제8호로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헌법」에 의한 자치법의 제정을 전제로 한 6개월간의 한시법(限時法)이어서 1949년 5월 17일까지 유효하였으므로 「지방자치법」이 공포, 시행된 8월 15일까지의 89일간은 지방행정의 무법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지방자치법」을 조속히 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지방자치법」은 자치단체의 종류를 서울특별시·도 및 시·읍·면으로 하고 기관대립형(機關對立型)을 채택하여 지방의회와 집행기관(장)을 분립시켜 상호 견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서울특별시장·도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시·읍·면장은 당해 지방의회에서 선출하게 하였으며, 지방의회는 임기 4년의 명예직 의원으로 구성하고 인구기준으로 의원 수를 정하였으며, 불신임결의권과 의회해산권을 부여하여 내각책임제형태를 가미한 절충식 정부형태를 채택하였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권한 부여는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를 구별하지 않고 포괄적 위임방식에 의함으로써 도와 시, 읍·면 간에는 기능배분이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질상 당연히 지방자치단체의 기능에 속하는 사항도 중앙정부가 지시, 감독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지방세로는 독립세로서 호별세·가옥세·차량세 등이, 서울특별시와 도에는 부가세로서 지세부가세(地稅附加稅)·영업세부가세 등이 있었다.
국가의 감독은 기관위임사무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사후적·교정적인 감독과 합법성의 감독만이 허용되도록 규정 되었으나 실제로는 국가가 강력한 감독권을 행사하였다.
행정에의 주민 참여와 주민통제 방법으로는 선거 이외에 민중출소제도(民衆出訴制度)를 두어 조례 또는 장의 명령이나 처분이 위법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일정 수 이상의 주민이 직접 감독관청이나 대법원에 출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지방자치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치에 관한 사항뿐 아니라 국가의 행정구역(군), 자치단체의 하급행정구역(구·동·이) 및 중앙정부의 일선기관(경찰서·소방서)에 관한 사항까지 일괄 규정하였으므로 국가의 보통지방행정기관에 관한 법, 즉 지방행정조직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둘째, 지방자치단체의 규모와 특성의 차이,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고려함이 없이 서울특별시에서 읍·면에 이르기까지 획일적으로 규정하였다.
셋째, 서울시를 서울특별시로, 부(府)를 시로, 울릉도(島)를 울릉군으로 개칭한 이외에는 종전의 지방행정조직을 그대로 계승한 점, 군수와 구청장을 국가공무원으로 보하고 도와 서울특별시에는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을 혼성 배치하되 과장급 이상의 직위를 모두 국가공무원으로 충원한 점이다.
「지방자치법」은 ① 156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법조문이 빈약하였고, 객관적이어서 내용상 애매한 점이 많아 시행과정에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었으며, 이 법의 시행령은 95개 조에 이르고 있어 법률체제가 바르게 되어 있지 않았다.
② 특히, 자치단체는 “지방의 공공사무와 법령에 의하여 그 단체에 소속된 사무” 및 “시·읍·면장에게 위임된 국가행정사무”를 처리한다고 규정하였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사무가 공공사무(자치사무)이고 어떤 사무가 위임사무인지를 규정하지 않아 국가-도-시-읍면 간 사무배분이 애매하였으므로 자치단체에 대한 국가의 감독, 중앙과 지방 간의 경비부담, 지방의회의 권한 등에 혼란을 야기시켰고, 건전한 지방자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③ 중앙통제는 엄격한 행정통제방식에 의하였고, 고유 사무에 대하여도 승인·취소 등의 권력적 감독방식을 채택하였다.
④ 시·읍·면의회가 선출한 시·읍·면장의 상급기관(군수)을 국가기관(國家機關)으로 하여 자치(自治)법으로서의 특질을 모호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자치법」이 공포됨으로써 민주적 이념에 바탕을 둔 주민 참정의 길이 마련되었으나, 지방선거가 실시되기까지 여순반란사건, 대구폭동사건, 6·25전쟁 등 혼란한 국내사정으로 인하여 3년을 더 기다려야 하였다.
결국, 1952년 4월과 5월에 지방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지방의회가 구성될 때까지는 의회기능을 서울특별시·도에서는 내무부장관, 시·읍면에서는 도지사의 승인을 얻어 각 자치단체장이 수행하고, 시장은 대통령이, 읍면장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하는 경과규정이 그 효력을 지속하였다. <중략>
1960년 이후 지방자치에 관한 법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 제4호로써 전국의 지방의회를 해산시켰고, 5월 22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군사혁명위원회의 개칭)포고 제8호로써 읍·면에서는 군수, 시에서는 도지사, 서울특별시와 도에서는 내무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집행하도록 하였다.
1961년 6월 6일에 공포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도지사·서울특별시장 및 인구 15만 이상의 시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승인을 얻어 내각이 임명하고, 기타의 자치단체장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1961년 9월 1일에 법률 제787호로 공포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농촌의 기초자치단체를 읍·면에서 군으로 개정하였다.
지방의회의 의결을 요하는 사항에 관하여 도·서울특별시는 내무부장관, 시·군은 도지사의 승인을 얻어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읍·면장은 군수가, 동·이장은 시·읍·면장 또는 구청장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행정에 대한 주민참여와 주민자치의 길이 막히고 자기 기관선임의 원칙이 배제됨으로써 독립세의 부과·징수, 재산의 소유·관리, 독자적인 예산·회계 등의 자주적 재정기능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지방자치의 기능이 정지된 채 제3공화국시대·제4공화국시대를 거쳐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에 이르렀다.
1991년 이후 지방자치의 역사
1991년 6월 지방의회를 시작으로 제7·8공화국에 이르러 지방행정이 본 궤도에 오르고 있다. 5·16군사정변 이후에 단행된 지방자치제도 개혁의 중요한 내용은 전술한 것외에도 ① 대도시행정의 특수성을 인정하여(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 1963년에 부산시를, 1981년에 대구광역시와 인천광역시를, 1986년에 광주시를 각각 정부직할시로 승격시켰다.
② 지방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하여 서울특별시장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직할시장과 도지사는 내무부장관의 제청으로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시장·군수는 도지사의 추천으로 내무부장관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각각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③ 지방의회에 관하여 제3공화국 「헌법」은 그 구성시기를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였으나 제4공화국 「헌법」은 지방의회를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지방자치의 시행은 통일 이후에나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해 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헌법」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를 감안하여” 지방의회를 순차적으로 구성하되 그 구성 시기는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지방자치를 실시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정부는 1987년도에 단계적으로 지방자치를 실시할 예정으로 1986년에 지방자치에 관한 공청회를 지역별로 개최하여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였고 지방자치 법 개정 법률안을 성안하여 1986년 10월에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 뒤 제6공화국에서는 지방자치에 관한 규정을 두고 세부규정에 관해서는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제9차 지방자치제에 의한 법 개정
30여 년간 지방자치의 공백기를 지나 제9차 개정지방자치법과 지방의회의원선거법에 따라 1991년 3월 26일 시·군·자치구의회(기초의회) 의원선거를 실시하였다. 총 3,562개 선거구에서 9,963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하여 평균 2.3:1의 경쟁률을 보인 기초의회 의원선거에서는 선거권자 2830만 1580명 중 평균 55%가 참가하여 4,304명의 기초의회의원을 선출하였으며, 도시의 투표율이 농촌보다도 낮았다.
또한 서울특별시, 5개 직할시 및 9개 도에서 치루어진 광역의회의원선거에서는 총유권자 2803만 3024명 중에서 58.9%가 참여하여 총 866명의 시·도의회의원을 선출하였으며, 도시와 농촌간의 투표율은 기초의회의원선거와 동일하게 도시의 투표율이 농촌의 투표율보다도 저조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1995년 6·27지방선거
1995년 6월 27일 35여년 만에 광역 및 기초단체장과 199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광역 및 기초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광역단체장과 광역의원의 경우 여당보다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중앙정치의 영향을 받아 지방색이 뚜렷한 선거결과를 낳았으며, 연령별분포에서 보는 바와 같이 50대가 전체 지방선거에서 최대의 당선자를 내고 있다.
1998년 6·4지방선거
1998년 6월 4일 1995년에 이어 광역 및 기초단체장과 광역 및 기초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광역단체장과 광역의원의 경우 6·27지방선거에서와 같이 여당보다 야당이 많은 당선자를 내었고, 1995년의 6·27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대로 지방색이 뚜렷한 선거결과를 낳았으며, 연령별 분포에서도 이전의 선거와 마찬가지로 50대가 전체 지방선거에서 최대의 당선자를 내고 있으며, 40대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방 자치사를 보면 그 역사가 결코 짧지만은 않다. 조선시대 농촌의 자연발생적 촌락의 집합인 동·이와 동·이를 통할하는 면은 일찍이 자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으며, 특히 갑오개혁 이후 1895년에 발표된 「향회조규」와 「향회판무규정」은 지방주민이 당해 지방행정단위의 공공 사무처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고, 이회·면회·군회를 구성하여 운영한 것은 현대적 지방자치제의 발달에 역사적 의의가 컸다. 또한 1952년부터 1961년 5월까지 실시된 3회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의 운영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고,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 드러나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실시될 수 있는가 하는 회의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은 매우 소중한 것이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나라 지방자치를 건전하게 실시하여 풀뿌리 민주주의의 이념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