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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峻嚴)한 교훈』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峻嚴)한 교훈』
류광식 대기자

우리의 식탁(食卓)에 흔히 오르는 나물 중 ‘숙주나물’이 있다. 본래 녹두(綠豆)를 틔워 만든 이 나물은 녹두나물이라 불려야 마땅하지만, 여기에는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비극(悲劇)적인 정치사(政治史)가 서려 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지극한 총애(寵愛)를 받으며 집현전 학자(集賢殿 學者 )로 이름을 떨쳤던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가 그 주인공(主人公)이다.
‘한가로움을 보존하는 집’이라는 뜻의 호를 가졌던 그는, 비록 마음의 평온을 꿈꿨을지 모르나 현실(現實)에서는 권력(權力)의 중심(中心)에서 거센 풍파를 일으켰다. 그는 집현전에서 함께 동문수학(同門修學)하며 단종(端宗)을 끝까지 지키겠다 맹세했던 동료(同僚)들을 등지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편에 서서 영의정(領議政)의 자리까지 올랐다.
세종대왕이 어느 깊은 밤, 집현전 학자 신숙주(申叔舟)가 밤새 글을 읽다 지쳐 잠든 모습을 보시고, 대왕께서는 친히 자신의 용포(龍袍)를 벗어 신하의 어깨에 덮어주셨다. 이는 군신(君臣) 간의 두터운 신뢰이자 애민(愛民) 정신의 극치였다. 그러나 훗날 그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어 버렸다. 결국, 백성(百姓)들은 쉽게 변하고 상하는 녹두나물의 성질(性質)을 보고, 신의(信義)를 저버린 신숙주의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별칭(別稱)이 아니라, 침묵(沈默)할 수밖에 없었던 민초(民草)들이 역사(歷史)의 법정(法廷)에서 내린 준엄(峻嚴)한 판결(判決)이었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조선의 물줄기를 바꾼 참혹(慘惑)한 사건(事件)이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王位)에 오른 세조(世祖)의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을 걷는 선비(先卑)들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 길은 죽음으로 신념(信念)을 증명(證明)한 사육신(死六臣)의 길이었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 이들은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발각(發覺)되어 세조 앞에 끌려갔다. 세조는 그들의 재능(才能)이 아까워 회유(懷柔)하려 했으나, 성삼문은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끝까지 ‘나으리’라 부르며 저항(抵抗)했다.
달궈진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는 혹독(酷毒)한 고문(拷問) 속에서도 박팽년은 세조가 내린 녹봉(祿俸)을 한 번도 손대지 않고 창고(倉庫)에 쌓아둠으로써 자신이 세조의 신하(臣下)가 아님을 증명했다. 거열형(車裂刑)이라는 참혹한 극형(極刑) 앞에서도 그들은 의연(毅然)했다.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라고 읊조린 성삼문의 절명시(絶命詩)는 오늘날까지도 선비 정신(先卑 精神)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사육신이 뜨거운 피로 충성(忠誠)을 맹세했다면, 차가운 은둔(隱遁)으로 지조(志操)를 지킨 이들이 바로 생육신(生六臣)이다.

의절사(義節祠);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사육신공원에 위치.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이들은 세조의 치세(治世) 아래서 어떠한 관직(官職)도 거부(拒否)한 채 산천(山川)을 유랑(流浪)하거나 낙향(落鄕)하여 평생(平生)을 야인(野人)으로 살았다. 천재 시인(天才 詩人)으로 불렸던 김시습은 단종의 폐위(廢位) 소식을 듣고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운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僧侶)가 되어 평생을 방랑(放浪)했다.
그는 세조가 주는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오물(汚物)처럼 여겼으며, 권력의 부당(不當)함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생육신의 삶은 사육신의 죽음만큼이나 고통(痛苦)스러웠을 것이다. 화려(華麗)한 중앙 정계(中央 政界)의 유혹(誘惑)을 뿌리치고 가난과 고독(孤獨)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단번에 목숨을 끊는 것보다 더 긴 인내(忍耐)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이들은 방식(方式)은 달랐으나 본질(本質)은 같았다. 인간(人間)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最小限)의 도리(道里)인 의(義)를 위해 세상의 이(利)를 버렸다는 점이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노량진(鷺梁津) 언덕의 사육신묘에는 참배객(參拜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신숙주의 묘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쓸쓸히 잊혀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時代)를 살고 있는가. 실용(實用)과 효율(效率)이라는 미명 아래 신의와 절개는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물)로 취급(取扱)받곤 한다. 어제의 동지(同志)가 오늘의 적(敵)이 되고, 자신의 이익(利益)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신념의 옷을 갈아입는 정치권(政治圈)과 사회(社會)의 모습은 신숙주의 변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애국(愛國)이라는 모호(模糊)한 구호가 아니다.
진정으로 가치(價値) 있는 이들은 우리 사회의 근간(根幹)인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수호(守護)하기 위해 묵묵히 헌신(獻身)하는 사람들이다. 사육신과 생육신이 보여준 불굴(不屈)의 의지(意志)는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價値)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이들의 정신(精神)적 뿌리와 맞닿아 있다. 자신의 사사(査査)로운 이익보다 공동체(共同體)의 올바른 가치와 체제(體制)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眞正)한 시대정신(時代精神)이기 때문이다.
사육신과 생육신의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우리 가슴 속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숭고(崇高)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신념이 살아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역사는 결국 승자(勝者)의 기록(記錄)이라 말하지만, 진정(眞正)한 승자는 권좌(權座)에 오른 자가 아니라 백성의 가슴 속에 영원(永遠)히 살아남는 자다. 신숙주가 얻은 권력은 짧았으나 그가 남긴 오명(汚名)은 길었다. 반면 사육신과 생육신이 겪은 고초(苦楚)는 짧았으나 그들이 남긴 향기(香氣)는 수백 년을 지나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의 도덕(道德)적 근간(根幹)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이들의 이정표(里程標)가 되고 있다.
인간의 위대(偉大)함은 그가 앉은 자리의 높이가 아니라, 그가 지켜낸 인격(人格)과 신념의 깊이에서 나온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육신의 용기(勇氣)와,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지조가 그리운 시대다. 여·야 할 것없이 갈등으로 정체성마저 불분명한 이 혼란스러운 시점에 “우리 사회의 지도층(指導層)과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사육신과 생육신이 던져준 이 준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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