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wer of feeling together and it is not a shame asking a question to subordinate.』

여름이 너무 빨리 온 것 같다. 정말 덥다. 옛말에 썩어도 준치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지구 온난화 영양으로 밀양, 경북 영양도 더울 때가 있지만, 역시 대구는 최고로 덥다는 명성이 떠오른다. 이럴 때일수록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예민해서 싸움이 날 수 있다. 이럴 때 지방자치 책을 읽는 독자분들에게 무슨 글을 읽게 해서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글을 써본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공감의 힘이다.
타인의 마음을 공감한다는 것은, 나의 경험, 지식, 감정, 체험, 느낌, 생각을 토대로 말하는게 아니며, 내 것이 들어가면 “조언“이 되어 버린다. 말과 글에도 적절한 때와 시기가 있다. 때에 맞지 않는 말, 글은 서로 간의 국경이 생기는 계기가 되어, 사이가 멀어지거나 의심하고 오해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 없는 사람을 대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트레스가 심했겠다“ 이런 생각을 잘못한다. 말에는 순서가 있다. 힘들어하거나 고민이 있는 대화 중에 상대에게 조언이 먼저 나가면 상처가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는 ”그 상황이었으면 많이 힘들었겠다“ 이렇게 공감해주고 위로의 말을 해 준 후 조언을 남겨야 한다.
이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존중이다. 타인의 마음과 상태를 존중하지 않는 대화는 그에게 무관심하다는 증거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즉, 다른 말로 무관심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카톡으로 보내온 좋은 글 두 개를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하여 칼럼으로 옮겨본다.
어떤 할아버지가 암으로 진단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성격이 난폭해지더니 주위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소식을 듣고 이웃집 꼬마가 할아버지 병실을 찾았다. 30분쯤 아이를 만난 할아버지는 갑자기 태도가 온순해 졌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아이에게 “할아버지와 무슨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대답했다. “그냥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한글 사랑에 일생을 바친 최현배 선생이‘조선어학회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감옥을 나왔을 때의 일이다. 한 청년이 매일새벽 선생의 집에 찾아와 앞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마을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청년이 말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습니다.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죠. 선생님께선 굶으면 낫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혼자선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고 하시면서 저와 함께 굶으셨어요. 밤늦게까지 저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며 돌봐주셨지요. 감옥에서 받은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이렇게 마당을 쓰는 것입니다.”
아픈이에게 베푸는 최고의 위안은 그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보다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에게 더 따스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것이 공감(共感)의 힘이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에 비를 흠뻑 맞은 일이 있었다. 빗소리, 바람 소리, 물 흐르는 소리에 흠뻑빠져 옷이 젖는 줄도 몰랐다. 그걸 본 어머니는 빨리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야단치지 않았다. 아들에게 다가가 꼭 껴안아 주었다. 함께 비를 맞으면서 자연의 교향곡을 들었다. 훗날 영혼을 울리는 교향곡의 싹은 아마 그때 움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는 평생 간직할만한 한 가지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恕” 라고 외쳤다. 恕(서)는 如(같을여)와 心(마음심)이 합쳐진 글자이다. 나의마음이 상대와 같아지는 것이‘ 서’라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유학시절, 교수님의 강의 중 “Understanding”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에 큰 감동을 받아 지금도 써먹고 있다. 즉, 아이들과 대화할 때는 몇 계단 아래 서서 아이와 눈높이를 같게 해서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면 서로 교감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맞아 공감! 공감은 그의 처지에서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대학교 강당에서 봉사 단체장 겸, 교수님이 한 말씀에 또 감동이었다. “복지란; 그 사람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인격체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행하기 어렵다. 매사 남 탓하는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경지일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불치하문 (不恥下問)이다.
‘아랫사람에게 물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옛말이 있다. 즉,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기꺼이 물어본다. 인생이란 알고 보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은, 타인이나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1953년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는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내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라는 멋진 명언을 남겼다. 내가 자신을 이기면 세상도 이길 수 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세상과의 싸움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을 어쩌지 못해 괴로워하고,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좌절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최고의 자산인 동시에 때로는 최고의 적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항상 ‘나’ 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귀착된다. 모든 것이 내 곁을 떠나도 끝에 가서 남는 것은 ‘나’ 뿐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도 ‘나’요, 해결책도 내 안에 있다. 불안하고 화나고 슬픈 것도 ‘나’ 때문이요. 세상과의 시비와 다툼도 ‘나’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모든 고통도 ‘나’ 때문에 일어난다. 나를 괴롭히는 것 또한,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것이다. 내가 괴롭고 힘든 것은 바로 나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나에 걸려서 넘어진다.
“나”를 제대로 알면 “나”를 이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적도 이길 수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던가?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자유로워진다.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필자는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며 살고 있다.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고집, 교만함 등이 꿈뜰 거리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으니 말이다.
글을 써내려 오면서 깨닫게 하심에 감사한다. 나도 겸손, 너도 겸손, 베풀면서 살자. 천년만년 사는 인생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전혀 죽을 것같지 않는 사람의 부고를 접하고 놀라는 일이 많지 않은가? 그저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공감 해주며 살자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아련히 흐르는 저 별빛 사이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