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벌써 10월 하고도 23일이다. 옛날 현역(現役)시절, 그러니까 85년 10월 22일일 대구 경북 영양 일월산(日月山) 공군 방공)관제(防空管制) 레이더 부대 근무 시 오병채 선배님의 즉석 제안(提案)으로 설악산 단풍 구경을 갔던 일이 생각난다. 요즈음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속초 입구 초소(哨所)에서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와서 검문검색(檢問檢索)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흔들바위를 밀어보고 설악산 정상을 오르며 단풍을 즐겼던 아름다운 기억인데 벌써 28년이 지난 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가을에 잊어서는 안 될 과거(過去)가 있다. 북한의 속셈과 남침(南侵) 야욕(野慾)이다. 지금은 전술을 바꾸어 핵 개발에 집중하여 시험 발사를 멈추지 않고 있음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릉시 강동면 동해고속도로 상에서 택시기사의 신고(申告)로 좌초된 선박이 북한의 소형 잠수함으로 확인되었고 무장공비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掃蕩)작전(作戰)에 돌입하였다.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잠수함 좌초 책임을 물어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조원 11명의 시체를 발견(發見)하였으며 도주한 잔당들 13명을 교전 끝에 소탕하였으나, 아군 11명, 경찰, 예비군 2명, 민간인 4명이 희생(犧牲)되었다. 북한의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국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시 동해안 일대에 침투하여 정찰 공작 활동을 벌이고 복귀를 시도하던 중 해상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육로(陸路)를 통한 복귀를 위해 상륙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문제의 잠수함은 1996년 9월 14일 오전 5시 부대가 있는 함경남도 락원군에서 정찰국장의 환송(歡送)을 받으며 출발했다. 휴전선 경계 5마일 정도까지는 별문제 없었고 이 지점부터 수중 공기관과 잠망경을 내린 채 해저(海底) 60~70m 깊이로 침투했다. 또 강릉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에선 잠수함을 부상시켜 잠망경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접근(接近)했다. 15일엔 해안 3~400m 거리에서 잠수함을 바닥에 가라앉혀 정찰조를 상륙(上陸)시켰고 이후 물속에서 대기하다 17일 정찰조를 태우기 위해 들어가던 중 그만 좌초(坐礁)했다.
이광수는 “대부분 잠수정이 후진하다 암초에 걸린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앞으로 들어 왔으나 파도가 너무 쳐서 옆으로 밀리면서 암초에 걸렸고 프로펠러가 망가지면서 좌초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찰(偵察)만 하고 임무 마쳐서 모두 복귀(復歸)하려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후에 침투(浸透) 목표가 대통령암살이라는 것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저격조만 상륙하고 승조원과 잠수함은 복귀하려다 실패하자 전원 상륙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조사에서 이광수는 10월 7일 김영삼 대통령(大統領)이 춘천에서 개막된 전국체전(全國體典) 개막식에 참석할 경우 저격(狙擊)할 목적이었음을 진술했다고 한다. 정부는 무장공비 침투 목적을 사실대로 공개할 경우 국내 경제가 위축되고 북한과의 대화 창구가 완전 폐쇄될 가능성이 있어 한동안 보류했다고 한다.
원래 계획은 1996년 10월 춘천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북한이 강릉시에 저격조만 상륙시키고 승조원은 복귀하려고 했으며 저격조는 민간인으로 변장한 뒤 낚시 가방에 불법 복제판 M16 소총을 넣고 낚시 동호회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강릉시에서 춘천시까지 도보로 이동한 후 이 전국체전 개막식(開幕式)에서 연설하기로 예정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이 탑승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함으로 인해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승조원들도 덩달아 작전에 투입(投入)되었으며 결국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저격조가 승조원 중 저격조 역할이 불가능(不可能)한 인원을 살해(殺害)했다.
1996년 9월 18일,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상에서 68사단 초병과 택시기사이진규가 50m 해상에서 좌초한 북한(北韓) 잠수함(潛水艦)을 발견하면서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시작되었고, 11월 5일 인제군 연화동에서 특전사 장선용 상사가 마지막으로 잔존한 정찰조 2명을 사살함으로써 작전을 최종(最終) 종결시킬 때까지 총 49일간 이어졌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리고 잊을 수 있는 일인가? 오늘날과 같이 안보(安保) 불감증(不感症)인 시대(時代)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북한과 분단이 되어있는 이유를 잊지 말자고 강조하고 싶다.
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自由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차이(差異)이다. 옛날 김정구 선생의 노래가 생각난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돈이 없어도 띵 호와!’ 우리가 어릴 때 흔히 들었던 노래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염료(染料) 기술(技術)이 없어서 무명옷을 그냥 입었던 것뿐이니,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왕실이나 양반네들은 중국(中國)에서 들어온 명주 비단으로 채색 옷을 입고 중국 종이와 물건을 드려와서 거들먹거렸고, 평민들을 거의 노예화했다. 그러니 조선의 지도층은 중국을 항상 대국(大國)이라 했고, 글줄이나 쓸 줄 아는 자들은 모두 중국에 빌붙어 살아왔었다. 그래서 중국과 우리나라는 5,000년 역사 가운데 질기게 같이 한 셈이다. 하지만 과거 청국(淸國)이나, 오늘의 중국(中國)이나 한 번도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거나 덕을 끼친 일이 전혀 없었다. 또 그들은 항상 우리를 그들의 속국(屬國)으로 생각했고, 우리는 조공을 그들에게 무던히도 바쳐왔고, 왕권(王權)도 중국 황제(黃帝)의 결재(決裁)를 받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소민족인 데다 중국을 하늘처럼 여기고, 중국을 배우고, 중국을 사랑하는 자들이 출세해서 권력을 잡고 있었고, 우리는 항상 못 나고 어리석은 엽전들이요, 바지저고리로 생각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으로 꽉 차 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머저리 같은 인조임금은 삼전도의 항복으로 청나라에 60만 명의 꽃다운 조선의 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쳤으니 그것은 나라도 아니었다. 정말 그 당시 조선이 그토록 중국에 종노릇 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그런데 이러한 종노릇은 중국 공산당이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지금도 개떡으로 여긴다. 몇 해 전에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혼밥만 8끼를 먹고 돌아왔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슈가 될 정도로 완전히 자유대한민국을 대놓고 무시(無視)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 6·25 때, 북한이 남침하여 대한민국이 거의 공산화 될 뻔했으나, 1사단의 백선엽 장군(將軍)의 용맹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일본에 있던 맥아더를 불호령해서 한국을 즉시 도우라는 명령으로 다부동 전투(戰鬪)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3·8선을 넘어 평양을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중공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우리의 남북통일을 막았으니 중국군 또한 유사시(有事時) 북한을 돕는 우리의 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지금도 끊임없이 자유대한민국에 간첩(間諜)을 남파하고, 국민(國民)의 갈등(葛藤)을 일으켜서 내분을 일으키면서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는 김정은과 북한군(北韓軍)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군 지휘관들은 철두철미한 대북(對北) 대비태세에 만전(萬全)을 기울이고 우리 국민들은 지난 일이지만 북한의 1950년 6.25 남침 전쟁의 아픈 과거를 자녀들에게 교육하며, 자유대한민국의 수호와 번영, 발전을 위해서 사상적으로 재무장(再武裝)했으면 하고 기원한다.
이 광 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침투한 북한군 무장공비 중 생포되어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
1965년 1월생으로 황해북도 금천군 계정리 출생이다. 협동농장원 출신인 아버지 이병호와 어머니 박영순 사이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81년 계정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육군에 입대했다. 1991년 8월부터는 인민무력부 정찰국 3기지에서 근무했고, 1992년 부대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해 1994년에 아들도 하나 낳았다. 1995년 7월부터 22전대 2편대 1호 잠수함 조타수로 복무하다가 남한에 침투조가 탑승한 잠수함의 조타를 맡았는데 잠수함이 해변에서 좌초되며 그대로 고립된다.
다른 동료 둘과 괘방산으로 도망가면서 배가 고파 고생했는데, 동행했던 동료들은 “배고파서 더는 못 가겠다. 이곳에서 싸우다 죽자”고 했다고 한다. 그는 싸우다 죽기보다는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몰래 빠져나온 뒤 북쪽으로 도보로 이동했다. 그렇게 산 다섯 개를 넘었는데 날씨가 덥고 갈증도 심해 뭐든지 먹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산을 내려와 민가에 접근했다가 집주인의 전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최우영, 전호구 경장에게 생포되었다.
귀순한 뒤에는 해군 교육사령부 산하 충무공 리더십 센터에서 정훈 교관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