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에는 김천(金泉)에 사시는 지인(智人) 원로 목사님 부부(夫婦)와 아주 오랜만에 직지사(直指寺) 사에 들려 산책을 했다. 종교(宗敎)를 떠나서 직지사는 정문부터 대웅전까지 나이 드신 분들에게도 경사가 없이 완만하여 걸으면서 구경하기에 딱 좋다. 함께 가신 분들이 모두 기독교인(基督敎人)이었지만 다들 오랜만에 들려 본다는 생각에 기분들이 좋으셨다.
모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온 것도 있지만 정말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화창한 날씨가 모든 사람에게 오유지족(吾唯知足)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로 행복했다.
이런저런 삶을 이야기 나누면서 직지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축지법을 쓰면서 살았다는 사명대사가 이곳 직지사에서 출가(出家)했다는 것 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 눈과 마주친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었는데 오유지족이다. 네 한자가 입구를 중심으로 한 글자처럼 빙 둘러 있어서 집중(集中)을 하여 보게 되었는데 그날 생각이 나서 오늘 글로 지방자치 칼럼에 주제가 되었다. 김천이 고향인 분들이나 직지사를 아는 분들에게는 반가워하실 것이고, 몰랐던 분들은 직지사에 대해 또 오유지족의 삶을 살면 인품(人品)도 더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함께 공유(共有)해 본다.
직지사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황악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태조 때 능여가 태조의 도움으로 크게 중창했고,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17세기에 중건을 하여 규모가 8전·각·당·장·문에 정실만 352칸에 달하고 26개의 부속(付屬) 암자(庵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순조대 이후 퇴락을 거듭하다가 현대에 들어 규모가 다시 크게 확장(擴張)되었다.
대웅전과 비로전을 중심으로 많은 전각들이 있고 보물인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석탑, 불화 등 중요(重要)문화재(文化財)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本寺)이다.
418년(눌지왕 2년)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한다. 직지사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하고 황악산(黃嶽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로 불렸다는 설과, 고려 초기에 능여(能如)가 절을 중창할 때 절터를 측량하기 위해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直指寺)라고 하였다는 설, 선종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자장(慈藏)이 중창하고 930년(경순왕 4년)에 천묵(天默)이 중수하였으며, 936년(태조 19년)에 능여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크게 중창하였다. 당시의 중요 건물로는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대비로금당(大毘盧金堂)·극락전·원통전(圓通殿)·지장시왕전(地藏十王殿)·응진전(應眞殿)·설법전(說法殿)·선등각(禪燈閣)·대장전(大藏殿) 등이 있었다. 현재 금석문으로 남아 있는 대장전비에 의하면, 이 절의 대장전에 금자사경(金字寫經) 593함(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399년(정종 1)의 중건과 1488년(성종 19) 학조(學祖)의 중수가 있었으며, 1596년(선조 29) 왜병들이 불을 질러 43동의 건물 가운데 천불전(千佛殿)·천왕문(天王門)·자하문(紫霞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이때 법당 앞에 있던 대형 5층 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중건에 착수하여 1966년부터 1981년 10월까지 10동의 건물을 중건하고 10동을 이건했으며, 9동을 중수(重修)하였다고 한다.
내 눈에 확 들어왔던 오유지족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자 입구자 “口”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상하에 각각 글자가 모여 1개의 글자를 이루고 있다.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너와 내가 만족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나는 오직 족함을 안다.’
‘나는 현재에 만족할 줄 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라.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라.)’
‘나는 오직 만족한 줄을 안다.’
이렇게 여러 말로 반복하는 것은 모름지기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적은 것(小欲)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모든 사람이 고루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듯,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어야 되고, 모든 것이 진리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유지족(吾唯知足)의 일화
첫 번째 이야기
옛날에 한 심부름꾼이 상인(商人)과 길을 걷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그들은 강(江)가에 앉아 밥을 먹으려 했다. 그때 느닷없이 까마귀 떼가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상인은 까마귀 소리가 흉조(凶兆)라며 몹시 언짢아하는데, 심부름꾼은 도리어 씩 웃는 것이었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상인은 심부름꾼에게 삯을 주며 물었다.
“아까 까마귀들이 울어댈 때 웃는 이유(理由)가 무엇인가?” “까마귀들이 저를 유혹하며 말하기를, 저 상인의 짐 속에 값진 보물(寶物)이 많으니 그를 죽이고 보물을 가지면 자기들은 시체(屍體)를 먹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그런데 자네는 어떤 이유로 까마귀들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나는 전생(前生)에 탐욕(貪慾)심(心)을 버리지 못해 그 과보(果報)로 현생에 가난한 심부름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탐욕심으로 강도(强盜)질을 한다면 그 과보를 어찌 감당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가난하게 살지언정 무도한 부귀(富貴)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심부름꾼은 조용히 웃으며 길을 떠났다. 그는 오유지족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유지족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 대해 만족하라는 가르침이 담긴 말이다.
두번째 이야기
1519년 서른네 살 김정국(金正國:1485~1541)은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죽어나갈 때, 동부승지의 자리에서 쫓겨나 시골집으로 낙향을 해 고향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불렀다. 팔여(八餘)란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인데, 녹봉도 끊긴 그가 “팔여”라고 한 뜻을 몰라 친한 친구가 새 호의 뜻을 묻자, 은퇴한 젊은 정객은 웃으며 말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길 수 있기에 ‘팔여’라 했네.”
김정국의 말을 듣고 친구는 팔부족(八不足)으로 화답했습니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어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모든 일에 있어서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것이 없이 넉넉하게 살아도 그것을 모른 채 부족하다는 푸념만을 할 것이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는 상황이라도 즐겁다는 생각에 늘 행복할 것이라는 뜻이리라.
필자는 거짓말이 아니라, 어제 밤에 피곤하게 잠을 청하면서도 누울 자리 있어 평안하게 잘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렸고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면서 새날을 주심에 감사했고 더 나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하고 건강하게 타이핑하고 있으니 이 시간만큼은 오유지족하는 삶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지방자치를 구독하시는 단체장님들은 공무원들이나 시도민의 왕이시니 좀 도정, 시정, 구정, 군정이 바쁘고 힘든 일이 있어도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고생이니 오유지족의 정신을 생각해 본다면 행복하시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