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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사랑하는 마음(Love Country)

류광식 대기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야 다들 있겠지만 안동(安東)에 있는 하외 마을을 얼마 전 다녀왔다. 친환경적인 마을로 잘 보존(保存)되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몇 번을 가보았기에 취재차 갔었는데 이번에는 마을 빙 둘러싸고 유유히 흐르는 마을 옆 낙동강(洛東江)까지 가보았다. 이번 장마폭우로 강가에는 예쁜 모래사장이 가득 생겨 있었다. 필자가 버들 류(柳)가(家)이기 때문에 거슬러 올라가면 친족(親族)이나 다름이 없는 하회마을에 가보는 것은 자랑스럽기도 한 것이기도 하다.
친환경 기업 탐방(探訪)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류성룡 대감님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將軍)을 천거하여 훌륭한 장군으로 우리 국민이 존경(尊敬)하는 인물로 다 알고 있고 또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을 물리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좀 더 역사에 대해서 또 류성룡 어른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더욱더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회마을과 류성룡, 임진왜란의 국난(國難)을 극복(克服)한 류성룡을 조명(照明)해 보기로 한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최고 지휘자(指揮者)인 도체찰사직을 맡은 그는 이순신, 권율 같은 무명의 명장을 등용하고, 신분제와 조세 등 각종 불합리한 제도를 개혁하여 백성(柏成)들에게 꿈을 심어줌으로써 암울했던 전황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후 조선의 권력자들은 그가 시행한 정책을 모조리 파기하고, 조정에서 그를 퇴출(退出)시켜 버렸다. 하지만 류성룡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향리(鄕里)에 내려가 자신이 겪은 저간의 기록을《징비록》에 담아 전쟁의 참혹한 정경과 그에 대한 반성, 후손(後孫)들이 앞으로 어떻게 이런 비극에 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가 제시한 국난극복의 요체는 유비무환(有備無患. 무슨 일이든 미리 대비해 두면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소를 도둑맞았다면 다음에 소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 외양간을 튼튼하게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대의 위정자(爲政者)들은 노재상의 이런 평범하고도 간곡한 충고를 외면했고, 그 업보는 훗날 조선이 신흥강국 청나라의 말발굽 아래 처절하게 짓밟히는 결과로 되돌아왔다. “이 청년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1542년(중종 37년) 10월 1일, 외가인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세 살 어린 이순신을 만난 뒤 평생의 후원자(後援者)가 된다. 1558년(명종 13년) 17세 때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결혼했고, 1562년(명종 17년) 퇴계 이황의(조선 중기 주자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조선의 유학자.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퇴도, 도수이며 1548년 단양군수, 풍기군수를 지내다가 이듬해 병을 얻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공부했다. 이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 수양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사잠>, <논어집주>, <주역> 등을 진강했으며 <성학십도>를 저술해 바쳤다) 제자가 되어 안동의 도산서당에서 에 학문을 익혔다.
당시 퇴계는 유성룡을 가르치면서 “이 청년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1564년(명종 19)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1566년(명종 2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승문원 권지부정자란 벼슬을 얻었다. 1568년(선조 1년), 사헌부 감찰 직에 있던 유성룡은 사신 이후백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에 갔다. 당시 그는 명나라의 태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왕양명과 진백사의 학문을 유학의 정통으로 여기던 그들에게 설문청이라는 학자를 소개함으로써 충격을 주었다. 그처럼 유학의 본고장에서 자신의 뛰어난 학문을 과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같은 요직에 임명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학식이 뛰어난 관리가 마음껏 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의 혜택까지 받았다.
유성룡은 39세였던 1580년, 부제학에 임명됨으로써 조선의 유학을 선도하는 인물로 인정받았다.

류성룡柳成龍 출생 : 1542년 (중종 37), 사망 : 1607년 (선조 40) 대표작 : 징비록, 서애집, 본관 : 풍산(豊山, 안동시 풍산읍)

유비무환, 국난이 다가온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를 겪었고,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정치 투쟁으로 몹시 혼란스러웠다. 명종 대에 권력을 쥔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싸웠고, 동인은 또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 등 당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문제가 심각했다. 2백여 년 동안 유지된 조선의 국방(國防)체제(體制)는 오랜 평화 기간 때문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이런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 했지만, 국방 재정이 허약했으므로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무렵 일본(日本)에서 통신사를 요청하자 임금은 황윤길과 김성일을 보내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몇 달 만에 되돌아온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의견(意見)을 내놓아 정세의 판단을 어렵게 했다. 모든 것이 당쟁 때문이었다. 당시 우의정(右議政)에 이조판서를 겸했던 류성룡은 조정에서 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들이 서인 정철을 벌하자고 했을 때 온건파인 남인(南人) 편에 서면서 강경파인 이산해와 정적이 되었다. 얼마 후 일본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려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국서가 당도했다. 거절(拒絶)하면 그를 트집 잡아 조선을 침략해 올 것이 분명해졌다. 위기를 감지한 류성룡은 형조 정랑 권율과 정읍 현감 이순신을 각각 의주 목사와 전라도(全羅道) 좌수사(左水使)로 추천하고, 일본의 침입 경로로 예상되는 경상도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을 이일로 교체했다. 아울러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兵法書)를 써서 이순신 장군에게 보냈다.

이처럼 임진왜란이 직전에 유성룡은 이순신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왜적의 침략(侵掠)에 대비했던 것이다.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류성룡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라고 간청했다. 아울러 왕자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임금을 지키는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해야 한다고 종용 했지만, 임금은 이런 류성룡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는 동래성(東萊城)을 함락하고 상주와 청주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 질풍처럼 한양으로 몰려왔다. 선조는 허둥지둥 북쪽으로 피란하면서 류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총지휘하게 했다. 당시 겁에 질린 선조 임금은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유성룡은 그렇게 되면 조선이 멸망할 것이라면서 극적으로 반대했다. 1593년, 유성룡은 평안도 도체찰사로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임진강에 부교를 놓아 대군을 건너게 했다. 당시 밧줄을 이용하여 강 위에 다리를 놓은 부교는 류성룡이 얼마나 뛰어난 두뇌(頭腦)를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그 후 류성룡은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고,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軍士)를 총지휘했다. 서울을 되찾은 다음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사훈련(軍事訓練)을 실시했다. 이때 화포와 비격진천뢰 등 각종 신무기를 제조하여 왜군을 괴롭혔다. 특히, 그는 전쟁의 여파로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한 대책에도 골몰했다. 유성룡은 피폐해진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각종 민생정책을 입안했다. 1594년(선조 27)에 진관법을 다시 쓰기로 하고 국민군 제도를 확립했으며,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쌀로 대신하여 바치게 하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다. 또 나라에서 소금을 많이 만들어 쌀로 바꾼 다음 군량미(軍糧米)로 삼게 했다. 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안집도감을 설치했고, 지방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게다가 문벌(門閥)과 신분(身分), 출신(出身) 지역(地域)의 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조선을 지킨 유성룡과 이순신
전란 초기 선조는 신립의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분개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피난 중에도 임금(林檎)은 적을 물리칠 방안보다는 도망치는 계획에만 몰두했다. 당시 그는 요동으로 가면 나라는 망해도 자신은 명나라의 제후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가 압록강을 건너면 요동 지방에 유폐할 것이라는 말을 듣곤 감히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당시 류성룡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도 안정되고 튼튼해진다는 유교적(儒敎的) 통치이념을 임금보다 더욱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 임금은 자기 나라 조선보다 부모의 나라로 여기던 명나라 군대(軍隊)에만 기대려 했다. 그 때문에 류성룡은 전쟁 내내 임금과 싸워야 했다. 다행히도 그가 천거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미리 준비한 거북선과 각종 전함, 화포로 남해를 굳게 지키며 연전연승을 거둠으로써 전황(戰況)을 유리(有利)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이순신이 남쪽에서 시간을 벌어주자 유성룡은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처럼 육지에서 유성룡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바다에서 이순신의 의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전황이 유리해지자 선조와 조정 신료들은 이순신에게 무군지죄(無君之罪 역적죄), 부국지죄(負國之罪 국가반역죄), 함인지죄(陷人之罪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 기탄지죄(忌憚之罪 방자한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이순신의 목숨이 경각에 다다르자 분개한 류성룡은 강력히 항의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자 선조는 류성룡을 경기도 지방으로 순찰을 보낸 다음 이순신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죽이려 했다. 그때 병조 판서 정탁의 변호로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궤멸되자,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삼도 통제사로 재임명했다. 그렇듯 이순신이 남해(南海)에서 왜군과 싸울 때 류성룡은 조정에서 어리석은 임금과 싸웠고, 오만한 명나라 장수들과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료들은 류성룡을 조정에서 끌어내리기에 골몰했다. 그것은 류성룡이 전쟁 중에 시행한 속오군, 작미법, 천민 발탁 등이 당시 사대부의 신분적 기득권을 크게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해도 세금을 낼 수 없고, 병역의무(兵役義務)를 져서도 안 되고, 서얼이나 천민에게 등용의 기회를 양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징비록》의 시간, 충정으로 잠들다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돌아온 유성룡은 지난 전쟁의 참상을 돌이켜보며 《징비록(懲毖錄)》을 쓰기 시작하여 63세 때인 1604년에 붓을 놓았다. 이 책은 1695년(숙종 21) 일본에서도 간행되었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류성룡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비옥한 강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난날 조정의 여러 가지 잘못을 반성(反省)하고 앞날에 대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이 책에는 특히 각처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뿐만 아니라 조선·일본·명나라 사이에 펼쳐진 외교전(外交戰)과 왜적의 무차별적인 살육과 약탈,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던 백성들의 아픔, 장수와 의병장, 병사 등 왜적과 싸우며 공을 세웠던 중요(重要)한 인물들에 대하여 자세히 그려져 있다. 전쟁 초기에 관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망명까지 고려하고 있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명나라 구원병은 하늘이 보내준 천병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구원병(救援兵)이 도착하고 이순신의 승전보와 의병들의 소식은 압록강에 인접한 최후의 피난지 의주까지 도망쳤던 그들에게는 기적과도 같았다. 유성룡은 《징비록》 후반부에서 이순신의 인물(人物)됨과 능력, 그와 관련한 일화(逸話)를 중점 소개했다. 그의 시선에 이순신은 단순히 훌륭한 수군(水軍) 지휘관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위인(偉人)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품고 있던 백 가지 경륜(經綸)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죽었으니 실로 애석할 따름이었다. 1605년(선조 38년)에 류성룡은 풍산군 서미동으로 이사한 다음 이듬해 자그마한 초당을 짓고 농환재라고 이름 지었다. 1607년(선조 40) 5월 6일 그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사흘 동안 시장을 닫게 했지만 상인(商人)들은 자진하여 나흘 동안 장사를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하회마을 류우하 이장(里長)님을 만나서 마을을 둘러보며 안동시의 하회마을 관리와 지원 그리고 하회마을 보존회의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회마을은 지금도 120가구 중 80%의 하회(河回) 류씨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취재에 협조해 주신 류우하 이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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