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와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서로 다른 시대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했지만, 여러모로 닮은 곳이 많다. 둘 다 대 정치가(政治家)이고 저널리스트란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둘 다 처음부터 언론(言論)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문을 발간하고, 대중 매체를 통해 국민을 깨우는 운동에 힘쓴 것이 엇비슷하다. 화란계 미국인 저자 반덴벅(Van den Berg)은 헤라우트지에 게재(揭載)된 카이퍼의 글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적인 깊이, 지성적인 넓이, 단순(單純) 명료(明了)함, 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타는 헌신(獻身)이 나타나 있다」고 했다. 카이퍼는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특히 그는 화란 문학(文學)의 귀재였다. 라이덴 대학교 재학시절에 그는 문학(文學)과 신학(神學)을 함께 공부하여 두 가지 학위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25세 때 <칼빈과 존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았다. 또 그는 신학뿐 아니고 수사학의 천재(天才)이기도 했다. 수사학(Rhetoric)이란, 말과 글을 가지고 가장 논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대방(相對方)을 설득시키는 학문이다.
4세기의 어거스틴, 16세기의 요한 칼빈도 수사학(修辭學)의 명수로 매일 같이 글을 쏟아낸 것처럼 카이퍼도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 거기다가 그는 독서광(讀書狂)이었다. 성경을 비롯해 교부들의 책, 종교 개혁자들의 책, 교회사, 정치와 문학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또 카이퍼는 김나지움에서는 영어, 독일어, 불어를 배우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완성했고, 학교(學校)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카이퍼는 1872년 일간지 <더 스탠다드(Staandard)>의 편집인(編輯人)이자 주필이 되었다.
더 스탠다드 지는 불란서 혁명이 인본주의 사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리면서 이에 반해서 하나님의 중심의 세계관으로,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과학 등을 다루면서 그가 임종하던 1920년까지 약 50년 동안 필봉(筆鋒)을 휘둘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간지 헤라우트(Heraut)의 주필도 겸했다. 스탠다드와 헤라우트는 카이퍼의 입이자 손이었다. 그리고 세속화되고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이고 자유주의(自由主義)로 넘어간 정치와 교회를 바로 잡기 위해 민중(民衆)을 깨우는 것은 신문의 역할이 가장 컸다.
19세기 계몽주의의 암울한 시대에 그는 자유주의를 공격하고, 모든 국민을 성경(聖經)적인 세계관으로, 하나님의 중심의 세계관으로 돌려놓는 유일(唯一)한 수단은 글로써 평범한 대중들을 쉬운 말로 깨우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50년 동안 일간지(日刊紙)와 주간지(週刊誌)의 편집주간으로 매일같이 논설(論說)과 칼럼을 쏟아내고, 거짓된 사상을 비판하고 국민의 갈 길을 제시(提示)했던 것은 확실한 기독교 세계관(世界觀)과 문장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不可能)하다.
또한 그의 논설과 칼럼은 곧 그의 칼빈주의 사상의 기반(基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대기(一代記)를 보면 <카이퍼는 그가 숨을 거두고 임종하는 순간에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고 했다. 또 그는 심포지움이나 컨퍼런스, 또는 국경일(國慶日) 등에서 연설을 맡으면 반드시 30~40페이지의 소책자를 만들어서 민중(民衆)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 작은 책들이 모여서 방대한 책이 되곤 했다. 그래서 카이퍼는 일생(一生)동안 크고 작은 책을 223권을 썼으니 가히 작은 도서관(圖書館)을 만든 셈이다.
내게는 1901~1905년 사이 카이퍼가 수상 시절에 설교(說敎)와 연설(演說), 대담(對談) 등 육성 테이프가 있다. 약 40년 전에 화란 국영방송(國營放送) PD를 통해서 카이퍼의 육성 연설을 구할 수 있었다. 테이프의 시대가 가고 CD 시대를 거쳐 지금은 USB 시대(時代)가 되어 컴퓨터에 잘 보관하여 시간이 될 때마다 잘 듣고 있다.
카이퍼는 168cm의 작은 키에 딱 벌어진 어깨에 모든 사람에게 영감(靈感)을 주는 천둥 같은 음성을 가진 소유자로, 굵은 바리톤에 명쾌한 논리가 일품(一品)이었다. 사람들 중에는 글을 잘 쓰면 말을 잘못하고, 말을 잘하면 글이 안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카이퍼는 말과 글이 늘 같이 가고 말과 글이 들어가는 곳에 세상이 변하고 가정과 교회가 변하고 정치가 변했다. 우리 초대 대통령 이승만(Rhee Syng Man) 박사도 그의 학력, 실력, 그의 문필 그의 독립사상이 카이퍼와 견주어봐도 손색(遜色)이 없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도 저널리스트로 시작했다. 그 시대에 변변한 신문도 없었고, 인쇄기도 마땅치 않고 더구나 일제강점(日帝强占)이 시작되자 편집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주필(主筆)로서 <한성회보> <매일신문>을 통해 고난받는 백성들의 사정을 알리는 일을 했다. 더구나 옥에 같이 있는 동안 참 종이에 글을 써서 노끈을 만들어 옥 밖으로 내보내는 모험(冒險)을 했었다.
특히 그가 쓴 <일민주의>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 같은 책은 예언서(豫言書)가 되었다. 최근에 1942년에 단파 방송(VOC)을 통해 2300만 동포(同胞)들에게 자유 소식, 자유(自由) 메시지는 80년 전의 라디오로 우리 국민(國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었고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 <타임지> <데일리 뉴스> 등 언론(言論)을 이용(利用)할 줄 알았다. 최근 상영된 <기적의 시작> <건국 전쟁>도 따지고 보면 불순세력(不純勢力)의 왜곡(歪曲)으로 부서진 팩트 조각을 다시 복원(復原)한 것이 많다. <역사를 버리는 민족은 힘이 없고, 역사를 지킬 줄 알아야 희망이 있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날 수 없었지만, 카이퍼가 주필로 있던 Standard 지에 뜻을 이루지 못한 이준 열사 일행에 대해 대한민국(大韓民國) 사절단(使節團)을 동정(同情)하며 <비극의 코리아>라는 말을 쓴 것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해있다. 우리의 후손(後孫)들에게 자유대한민국(自由大韓民國)을 물려주려면 카이퍼와 이승만 같이 국민을 깨우고 계몽(啓蒙)하는 참된 정치인(政治人)과 저널리스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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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