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인민회의에서 ‘공화국 핵무력 정책’ 법으로 채택
김정은 “불가역적 핵보유국 지위 확보… 협상 없다”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공식화하는 법령을 채택하고, ‘핵포기’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그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논란이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북한은 1993년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자위적 차원의 핵무장을 본격화한 뒤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명의로 ‘핵무기 보유’ 를 처음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 이후 2017년 9월 3일 6차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일관되게 ‘핵보유국’임을 주장했다.
북한은 2012년 4월 13일 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고,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 직후인 9일 ‘핵보유국 지위 영구화 선언’을 하였다. 이어 4월 1일에는 ‘자위적 핵보유국 지위 공고화 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지난 8일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회의 2일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 정책에 대하여’라는 이름의 ‘핵무력 정책 법령’을 채택했다.
이는 지난 2013년 제정한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를 폐지하고 새로 전면 보강한 법령으로, 북한은 이를 통해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임을 강조하고, 핵무기 사용을 위한 핵전략과 핵태세를 대외에 공표했다. 또한 북한이 핵포기, 비핵화를 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법령 채택 뒤 한 시정연설에서 “핵무력 정책을 법화해 놓음으로써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의 지위가 불가역적인 것으로 됐다. 이제 만약 우리의 핵정책이 바뀌자면 세상이 변해야 하고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환경이 변해야 한다”면서 “절대로 먼저 핵포기란, 비핵화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김 총비서는 “미국이 노리는 목적은 우리의 핵 그 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핵을 내려놓게 하고 자위권행사력까지 포기 또는 렬세하게 만들어 우리 정권을 어느 때든 붕괴시켜버리자는 것”이라며 “나라의 생존권과 국가와 인민의 미래의 안전이 달린 자위권을 포기할 우리가 아니며 그 어떤 극난한 환경에 처한다 해도 미국이 조성해놓은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형세하에서, 더욱이 핵적수국인 미국을 전망적으로 견제해야 할 우리로서는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북한이 핵무력 정책을 법령화하고, 핵보유국으로서 자신의 핵에 대해 밝힌 입장은 그동안 미국 주도로 대북제재의 명분으로 삼아왔고, 우리 정부가 남북대화의 전제로 주장해온 ‘북한 비핵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북한이 핵보유국인가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왔지만 지난 2017년 수소폭탄 시험인 6차 핵실험 이후엔 사실상 핵보유국이라는 게 중론이다. 미국의 많은 정보기관과 전문가들도 북한이 핵보유국이란 사실에 동의한다.
예컨대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 관련, 미국의 합동군사령부 보고서(2008년 11월25일), 국가정보위(NIC) 보고서(2008년 11월), Gates 국방부장관의 ‘외교(Foreign Affairs)지’ 기고문(2009년 1-2월호) 등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명시하고 있다.
다만 미국 정부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확고한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 역시 북한이 핵보유국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전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만일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경우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기축통화인 달러를 통해 세계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의 영향력이 급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핵을 둘러싼 ‘비핵화’ 문제도 앞서 북한의 핵개발 역사와 지난 9월 8일 ‘핵무력 정책 법령’ 채택에서도 알 수 있듯 북한 스스로 ‘비핵화’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북한 비핵화’ 논란은 문재인 정부에서 불거지고, 미국 트럼프 정부가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 국제 문제로 비화한 것이다. 북한이 이번 ‘핵무력’ 법제화를 계기로 미국과 한국에 대해 비핵화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주목된다.
文정부·트럼프정부 책임론 불거지나
북한핵 문제가 세계적 이슈가 된 것은 ‘비핵화’라는 용어에서 비롯됐다. 정작 북한은 북핵 폐기를 뜻하는 ‘비핵화’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면서 국제적 문제로 부상했다.
이같은 사실은 역대 최장수 북핵 수석 대표를 지낸 이도훈 외교부 제2차관(현 외교부 2차관)이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를 인정한 적이 없다”고 밝히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도훈 2차관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9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3년 3개월 동안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의 남북 및 북ㆍ미 협상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이 차관은 지난 4월 13일 ‘국제 환경의 대변동과 차기 정부의 외교ㆍ안보ㆍ대북정책’을 주제로 한 세종연구소 주최 포럼에서 “(남·북·미 간 정상회담이 열린)2018년~2019년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북한 측은 한ㆍ미가 지향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인정한 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표명은 북한이 항상 주장해온 ‘조선반도 비핵화’를 되풀이한 데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조선반도 비핵화는 남북을 포괄하는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와 미국의 핵 위협 제거가 포함된 개념”이라고 했다. 이도훈 차관이 지적한 ‘북한 비핵화’의 오류는 문재인 정부 초반 발생했다.
2018년 3월 5일 당시 국가안보실장이던 정의용 전 외교부장관은 대북특별사절단대표단으로 방북해 김정은 총비서와 면담했다. 그리고 귀국한 다음날인 6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고 밝힌 게 ‘비핵화’ 문제의 시작이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하며“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김 위원장이) 비핵화 목표는 선대의 유훈이며,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밝힌 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 전 장관은 이틀 뒤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방북 성과에 대해 설명하며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전달했다. 정 전 장관의 말을 믿은 트럼프 대통령은 미북 정상회담을 북측에 제안했고, 2018년 6월 역사적인 싱가포르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은 북한핵과 관련해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묻자 김정은 총비서는 “금시초문”이라며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마디로 북한(김정은)은 ‘핵폐기’를 의미하는 ‘비핵화’를 말한 적이 없다.
1980년대 북한과 최초로 교역을 한 이래 대북사정에 정통한 장백산 해외동포지원사업단 이사장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말해왔다. 북한이 김일성 시절부터 1990년대 ‘고난의 행군기’에 수많은 아사자를 내면서까지 핵개발을 추진한 것은 ‘핵 없이는 북이 존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특히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으로부터 북한 체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핵보유’ 뿐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는 것이다.
장백산 이사장은 2018년 정의용 전 장관을 통해 ‘비핵화’란 말이 나왔을 때 “(북한이)그럴리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오판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장 이사장은 “북한이 ‘비핵화’를 말했다면 전 세계 핵보유국이 핵을 제거하면 북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를 거론했다면 남북을 비롯한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와 미국의 핵 위협 제거까지 포함된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2016년 7월 ‘조선반도 전역 비핵화를 위한 5개의 요구 조건’을 담은 정부 대변인 성명을 내고 남한 내 미 핵무기 공개, 미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금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했다.
장 이사장은 김정은 총비서가 ‘비핵화 목표는 선대의 유훈’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핵을 보유한 모든 국가들이 핵을 제거할 경우 그때 북한도 핵을 폐기(비핵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핵보유국이 핵을 제거할 가능성이 없는 만큼 북한의 핵 폐기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핵에 대한 입장은 문재인 정부 시절 첫 남북정상회담의 공동선언문인 ‘4.27 판문점선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공동선언문 3조 4항은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고 명기돼 있다. 이어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하였다”고 돼있다. ‘완전한 비핵화’, 즉 전 세계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고, 남과 북이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이 거론했다는 비핵화를 ‘북한 비핵화’로 오판 내지 오독함으로써 북한핵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됐고, 이를 미국이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 국제 제재 대상으로 부상했다.
북한 입장에선 사실상 핵보유국이면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과 비교해 부당한 측면을 호소할 수 있다.
북한이 지난 9월 8일 ‘핵무력 정책 법령’을 채택 하면서 강조한 것은 핵보유국이란 사실과 자위적 차원에서 핵을 보유하고 있지만 북한을 위협할 경우 선제공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법령 6조 ‘핵무기의 사용조건’에서 ‘국가의존립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를 명시하고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유엔과 미국의 강도 높은 대북제재로 인한 북한과 주민의 피해를 포함시킬 수 있다.
유엔과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의 명분은 북한이 비핵국가로 핵무장을 시도하고, 비핵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선 대북제재를 벗어나거나 완화하기 위해 핵보유국임을 증명할 7차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비핵화’ 문제를 유엔과 같은 국제 공론의 장에서 시비를 가릴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번 북한의 ‘핵무력 정책 법령’ 채택은 대북제재를 주도하는 유엔과 미국, 그리고 대북 적대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한국 정부를 향한 강력한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